일상생활에서 자연스럽게 이용하는 스마트폰과 각종 전자기기. 당연한 듯이 이용할 수 있는 편의점과 각종 편의시설, 우리는 그야말로 풍족한 시대에 살아가는 풍요로운 가장 앞선 인류이구나. 라는 생각을 문득문득 차를 타고 가던 중에 생각할 때가 있다. 원하는 모든 곳은 지구 어디에라도 비행기, 자동차, 기차 등 운송수단을 이용해 날아갈 수 있고 원하는 모든 것을 돈 혹은 다른 물질을 제공하면 얻을 수 있다. 나는 그런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런데 그런 일상 속에서 문득 시골의 조용한 곳에 내려가 스마트폰도 시끄러운 자동차 소리도 안 들리는 곳에서 평범하게 살고 싶다. 라는 생각을 하곤 한다. 그것은 아마도 어떤 문명의 편의로도 채워지기 힘든 그런 마음 안의 공허함과 쉴 곳이 없는 곳이다. 라는 생각 때문인지도 모른다.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들이 사는 곳 티베트. 신들이 사는 곳이라는 히말라야 끝자락에 있는 그들. 그리고 그 티베트가 있는 잠무카슈미르 지역의 라다크는 달라이 라마의 불교를 신앙으로 삼고 엄청나게 무더운 여름과 척박한 토양. 부족한 물. 영하40도에 이르는 겨울이 오는 사람이 살기에 결코 좋은 환경이라고 볼 수 없는 그런 지역이다. 하지만 라다크와 티벳 사람들은 자신들이 행복하다고 말한다고 한다.
돈이 많은 것도 아니며 내 기준의 어떤 편의도 보장받지 못하는, 마치 신대륙이 발견되기 이전의 아메리카 대륙에 살던 원주민 같은 불편한 삶을 살고 있는 듯한 그들이 가진 행복하다는 말. 나는 그것이 궁금해져서 이 책의 제목에 이끌렸다.
어쩌면 알고 있으면서도 어떻게 해야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무언가 가지기 위해 안달하지 않는지 명쾌하게 누군가가 해답을 주기를 원했다. 라는 이유인 것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전 세계 모든 이들이 알고, 티베트 신앙의 중심인 달라이 라마. 그가 추천했다는 라다크 인들의 삶은 나에게 해답을 줄 것이라는 막연한 확신을 느끼며 책을 읽어내려가게 되었다.
저자인 환경운동가 ‘헬레나 노르베리’는 이 라다크의 사람들이 과거 어떻게 자급자족의 경제를 유지하고 가족공동체라는 서로 따뜻한 도움과 온정을 나누며 살아갔는지. 그들이 왜 지금은 그렇게 살고 있지 않고 서구문물의 유입이라는 시대적 흐름 속에서 변해갔는지. 그리고 우리는 그 라다크인들로부터 무엇을 배우려고 하는가에 대해 기술하고 있다.
이 책의 제목인 ‘오래된 미래’에서 저자가 우리에게 알려주고자 하는 것은 라다크의 현재가 아니다. 라다크의 과거의 시간에 있는 것이다.
과거는 이미 지나가버린 시간이다. 지나가버린 것은 되돌이킬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가 과거를 기억하는 이유는 과거를 통해 현재를 반성하고 더 나은 미래를 만들기 위함이라고 한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저자가 이 책을 기술한 이유는 충분히 납득이 갈 만 하다. 그리고 전 인류가 요 근래 몇 십 년간 공동의 과제로서 논의했던 ‘산업화와 문명의 과도한 발전에 의한 자연환경의 파괴와 인류의 위기’ 라는 문제를 생각해본다면, 어쩌면 라다크인들의 과거와 현재를 통해 우리는 미래에 이 문제를 해결할 결정적인 단서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런 생각을 문득문득 책을 읽기 전에 하게 되었고, 최 근래 보았던 환경파괴, 온난화, 인간소외, 암울한 미래에 대한 영화와 소설책 등 많은 작품들은 내가 책의 내용에 대한 궁금증을 가지게 하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다.
저자의 의견은 대부분이 옳다. 나 역시 많은 부분에서 막연하게 가지고 있던 생각들과 흡사하다는 생각과 저자의 해결법이 이루어지면 참 좋겠다고 그렇게 생각하기도 했다.
자급자족의 라다크인들의 과거. 우리 모든 인류도 예전에는 그렇게 살았었다. 먹을 만큼만을 경작하고 가족들과 모든 생산물과 소비를 나누고 정보를 공유했으며, 개인 사유의 개념이 생겨난 것은 인류의 출현 훨씬 뒤의 일이었다. 자연을 인간의 생존에 필요한 그 이상으로 훼손하거나 다른 생물들을 죽이지도 않았으며, 신과 지구에게 언제나 감사하는 제를 지낼 정도로 우리 인류는 몇 세기 동안 지구와 함께 호흡하며 살았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개인의 소유에 대한 개념이 생겨나고, 집단 내에서 권력을 가진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많이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가 나눠지기 시작했으며, 점점 더 커져가는 공동체는 국가가 되고 문화권이 되고, 계층과 계급으로 나뉘어갔다. 앞을 다투듯이 석탄과 석유를 캐내고 거대한 공장을 짓기 시작하며 인간은 마치 산업화를 위한 하나의 부품인 것처럼 과거의 전통은 모두 부수어지고 새로운 것일수록 좋은 것이라는 생각이 팽배해져갔다. 그리고 지금 인류는 그렇게 발전이라는 족쇄 속에서 전통과 자연과 인간 자신마저 잃어버리고 있다.
많은 부분에서 공감한다. 우리는 더 이상의 개발을 지향점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더 이상 인류가 살 수 없게 되기 전에 환경보호에 집중적인 관심을 쏟고 돈과 권력이 아닌 내 주변 사람들과 가족의 건강과 화합을 위한 삶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봐야 한다. 하지만 저자가 그 해결법으로 과거 라다크인들 같은 삶을 살아야 한다는 주장에는 의문점을 던지게 된다. 이미 달라져버린 사람들의 사고방식은 뒤로 돌아가지 않는다. 이것은 나만의 비관주의가 아닌, 편하고 빠르고 이미 모든 발전에 익숙해져 그것이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어버린 개개인의 사람들에게 예전의 공동체적 생활방식과 자급자족, 자연과 함께 호흡하는 방식이 옳다고만 주장하는 것이 얼마나 실효성이 있는지에 대해서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그것은 마치 남들이 볼 때에만 분리수거를 하고 노인에게 버스 자리를 양보하는 것처럼 다른 사람들의 이목을 신경 쓰고 자기 자신이 이기적인 사람처럼 비춰지고 싶지 않아서 잠시 하는 양보 같은 느낌이기 때문이다. 라다크인들이 믿는 달라이라마의 티벳불교의 사고방식 안에서는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티베트가 아닌 다른 지구의 건너편에서 다른 문화와 사고방식으로 살아가던 사람들에게 강제적으로 강요하기에는 너무 이유가 충분하지 않다. 나에게는 저자가 내세우는 모든 해결법은 라다크인들의 과거 생활에 몰려있으며, 지금의 우리가 가진 모든 문제는 우리의 탓으로 돌리는 기분이었다.
실제 실현가능성은 미약해 보였으며 문제의 원인은 너무 거시적이어서 당장 자급자족으로 어떻게 살아가라는 것인지, 인분을 모아 농사의 재료로 삼아 농업을 유지하는 방식으로 돌아가자는 것은 ‘그렇다면 우리의 삶에 있어서 의식주는 충족이 되겠지만 우리의 삶이 의식주가 충족된다고 해서 그것이 전부가 될 수 있는가? ’ 라는 질문을 가졌으며 그렇다면 라다크인들처럼 우리 인류가 예전의 사고방식으로 사는 것이 진정 행복한 삶이라고 생각했다면, 몇 세기를 걸쳐 변화하고 발전해온 우리의 모든 발전을 위한 노력은 무의미한 것인가? 라는 생각도 같이 가져보게 되었다.
우리에겐 발전이 필요했고, 지금도 꾸준하게 발전되어 나가야 한다. 우리는 여전히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발전해나가야 한다. 과거의 방식으로 돌아가는 것만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기에는 개발로 인한 지구의 환경문제와 가정 파괴, 인간소외, 공동체 유대감 상실, 모든 문제들은 이미 너무 심각성이 커져버렸다. 이제는 해결법을 찾아나가는 것이 먼저이다.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다면 먼저 그 길을 되짚어 돌아가며 개선을 하고 좀 더 나은 공생의 방식을 개발하되 우리는 여전히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때로는 행복한 나라의 사람들 티베트인들과 라다크인들의 평화가 부럽고 그렇게 살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기도 한다. 하지만 이 라다크의 과거는 나의 현재에 대한 반성은 될지언정 미래는 되지 못할 것 같다. 그런 생각이 드는 책이었다.
'책장 너머 세상 - 독후감 & 서평' 카테고리의 다른 글
100년 후(2) - 조지 프리드먼 (0) | 2023.03.21 |
---|---|
조국의 시간 - 조국 (0) | 2023.03.18 |
100년 후 (1)- 조지 프리드먼 (0) | 2023.03.17 |
나는 단순하게 살기로 했다 - 사사키 후미오 (0) | 2023.03.16 |
금융의 딴짓: 타인의 돈인가?금융가의 돈인가? - 존 케이 (0) | 2023.03.15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