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가 쓰라고 해서 쓰는 거야.’
대체로 거의 모든 가정에서, 아이들은 아빠보다는 엄마와 더 친하다. 아무래도 엄마와 보내는 시간이 더 많은 가정이 많아서이기도 할 것이고, 요즘에는 예전처럼 아빠와 엄마의 역할이 확연하게 나뉘는 가정이 줄어들면서 전형적인 가족 형태가 아닌 경우가 더 많기는 하지만, 여전히 내 주변만 보아도 아빠와 친한 아이들보다는 엄마와 친한 아이들이 더 많은 것 같다.
그리고 그래서인지 엄마에게는 자신의 솔직한 감정이나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잘 하면서도, 아빠에게 그런 속마음을 이야기하기란 쉽지 않은 적이 나도 많았다. 물론 더 편한 존재라는 게 늘 즐겁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엄마는 더 편했기에 짜증나는 일이 있거나 뭔가 원하는 게 있을 때 그만큼 짜증을 부리고, 다투게 되는 경우도 많았다.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그런 시간들이 쌓여 엄마와는 끈끈함이 더 생겨나는 것 같다.
이 소설 안에는 은유라는 여자아이가 있다. 은유는 그런 전형적인 열 살짜리, 이제 막 사춘기에 들어서는 여자아이이다. 엄마는 늘 없었지만 엄마가 왜 없는지, 왜 아빠는 늘 냉랭했는지, 엄마는 어떤 사람인지 물어볼 수조차 없이 은유는 그저 엄마가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만 하면서 열 살이 되었다. 그리고 그런 생활에 익숙해질 때 쯤. 어느 날 갑자기 아빠는 재혼을 하게 되어 엄마가 생길 것이라고 말한다. 아마, 20살이 넘긴, 어느 정도 철이 든 다음에 그런 이야기를 들었다면 좀 더 아빠의 입장을 이해하려 했을 것이지만 이제 막 사춘기에 들어선 열 살 짜리 아이가 그런 아빠를 이해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저 왜 진짜 내 엄마에 대해서는 말해주지 않는지, 왜 갑자기 엄마가 생길 것이라고 말하는지 어린 은유는 아버지에게 쌓아온 불만과, 물을 수 없는 궁금증만을 가지고, 아빠의 제안에 의해 억지로 편지를 쓰게 된다. 바로 자기 자신에게.
그리고 이 이야기는 그런 아주 평범한 아빠와 딸의 이야기로부터 시작해, 시간여행과 과거로 간 편지라는 새로운 장르로 흘러간다. 2016년의 은유가 쓴 편지는 1982년의 은유라는 또 다른 동명이인에게 배달되어 버린 것이다. 처음에는 서로가 그저 장난을 치는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점점 두 은유는 이것이 장난이나 누군가의 거짓말이 아닌, 정말 편지가 알수 없는 이유로 과거와 미래로 배달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왜 자신들에게 이런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는지는 모르지만, 2016년의 은유는 자신이 몰랐던, 아빠는 이야기해주지 않았던 엄마에 대해 알고 싶어 편지를 쓰기 시작한다. 그리고 1982년의 은유는 그런 은유를 위해 은유의 아빠를 찾고, 엄마를 함께 찾아 나선다. 그리고 은유는 처음으로, 누구에게도 하지 않았을 아빠와 자신의 이야기, 자신의 속 마음을 편지를 통해 이야기하게 된다. 그 나이또래의 여자 아이들이 으레 그러하듯, 아빠보다는 엄마가 그립고, 엄마보다는 자기 친구들에게 속마음을 잘 이야기하는 것처럼, 2016년의 은유와 1982년의 은유는 서로 자신의 마음을 내보이며 급속도로 친해지게 된다. 그리고 그 편지는 1982년의 은유가 삼십대가 될 때까지 이어진다. 과거와 현재의 시간이 서로 다른 속도로 흘러가 2016년의 은유가 보내는 1년의 시간이 1982년의 은유에게는 30년이 넘는 시간이 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런 시간 차이는 이제 이 편지가 왜 과거와 미래로 배달되기 시작했는지 비밀을 밝히며, 우리를 생각지 못한 감동으로 이끌어간다.
‘있잖아 언니, 아빠와 나는 같은 일직선 위에 서 있는 기분이었어, 양끝에서 서로를 향해 달려오고 있는데 내가 달리기를 멈춰버린 거야. 그리곤 투덜거리는 거지, 아빠는 왜 더 빨리 달려오지 않는 거야. 왜 이렇게 멀리 있는 거야. 나는 투덜대기만 하고 달리기를 멈춰 버렸어...’
나와 내 주변의 모든 것들은 같은 시간대에서 살아간다. 마치 같은 곳을 보고 달려가는 것처럼, 하지만 같은 시간에 있으면서도 마치 다른 시간에 살고 있는 것처럼, 절대 좁혀지지 않는 간극 같은 것을 우리는 세대차이라고 부르는 것인지도 모른다. 같은 시간에 있기는 하지만, 서로 살아온 시간의 길이와 경험이 다르고, 같은 시대를 바라보는 시선이 다르다면 그들은 서로 같은 시간에 같은 것을 느끼며 살아간다는 동질감을 느끼기는 어려울지도 모른다. 그리고 우리의 주인공, 은유 역시 아빠와 함께 살아가지만 아빠와 늘 거리감을 느낀다. 그리고 같이 살아간 적도 없는 엄마에게 오히려 마음이 기울어있다는 느낌을 받게 만든다. 이제 어린 어이가 엄마를 그리워하는 것이야 당연한 것일 것이다. 하지만 이 소설에서 은유가 가지는 그런 감정은 너무나 흔한 시간여행이라는 소재 안에서,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부녀사이임에도 불구하고 애틋한 감정을 느끼게 만든다. 그리고 이 은유라는 아이에게 왜 갑자기 시간여행이라는 기회가 주어졌는지, 운명처럼 만난 또 다른 은유와 어떤 실로 연결되어 있는지 궁금증은 이야기를 읽을수록 더 커지는 것 같았다. 물론 나는 이 작품 이전에도, 시간여행에 관한 많은 작품들을 이미 만났었다. <시간 여행자의 아내>처럼 한 쪽만 시간여행을 하며 다른 한쪽의 어린 시절부터 어른이 된 이후까지 모두 지켜보는 이야기도 있었고, <너의 이름은> 애니메이션처럼 서로가 몸을 바꿔가며 서로 다른 시간을 번갈아 살게 되며 과거를 바꾸기 위해 고분 분투하는 이야기도 있었다. <당신 거기 있어줄래요.>처럼 과거 불의의 사고로 죽어버린 자신의 연인을 살리기 위해, 우연히 도달한 과거로의 시간여행에서 미래를 바꾸려는 주인공을 만나기도 했었다. <시월애>같은 작품은 이 작품처럼 편지가 과거로 배달되면서 두 주인공이 서로 대화하게 되는 꽤 비슷한 구조를 가지고 있는 경우이기도 했다. 그처럼 시간여행은 소설, 영화, 드라마 등 이미 수없이 많은 작품에서 다뤄지는 흔한 소재에 속한다. 그래서 이 작품을 읽으면서도 내가 이제껏 읽었던 수많은 시간여행을 소재로 한 작품들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그렇게 내가 느낀 그런 소재의 작품들은 과거 혹은 미래로 돌아가 자신과 관련된, 혹은 더 큰 목표를 위해 무언가를 바꾸려는 사람들의 의지에 관한 것이 많았다. 사람들은 언제나 지나가버린 시간에 대한 애틋함과, ‘만약...’이라는 아쉬움을 가지고 있기에 기회가 주어진다면 과거를 바꿔 더 나은 미래를 만들고 싶어 하는 공통된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런 모든 시간여행을 소재로 한 작품의 결말을 예상해볼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과거와 미래, 두 시간의 격차였다. 서로 다른 시간을 살아가는 주인공들이 만날 수 있을만한 짧은 시간 차이 속에 있다면, 언젠가 결말에서 그 두 주인공이 만나, 자신들이 겪은 꿈같은 일을 회상하며, 바꿀 수 있는 일말의 여지가 있다는 뜻이기에 해피엔딩을 기대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너무 큰 시간의 격차가 있다면 두 주인공은 서로 만날 수 없기에 아무래도 해피엔딩보다는 비극에 가까울 것이라고 예상하고는 했다. 물론, 영화 <동감>처럼 서로 가까운 미래였기에 오히려 서로 같은 시간에서 비로소 만났을 때 더 안타깝고, 더 애틋해지는 결말도 있었지만 말이다.
‘그 먼 시간을 건너 네 편지가 나에게 도착한 이유를, 너와 내가 사는 세계의 시간들이, 그 모든 순간들이 모여 있는 힘껏 너와 나를 이어 주고 있었다는 걸.’
어린 은유는 그토록 궁금했던, 가까워지고 싶었던 엄마의 어린 시절부터 자신을 낳고, 왜 자신과 함께 살 수 없었는지에 대해서도 알 수 있게 되었고, 무엇보다 아빠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엄마가 된 은유는 너무나 알고 싶었을, 보고 싶었을, 함께 하고 싶었을 어린 은유의 일상과, 은유가 커 나간 모습에 대해 알게 된다. 그런 모든 것들의 비밀이 밝혀지는 순간, 나는 왜 이 소설이 그토록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감동이라고 일컬어지는 지 알 수 있었다. 무언가 말로는 설명하기에 너무 큰 엄마의 사랑과, 처음이지만 너무나 사랑으로 키우려했을 아빠의 마음, 앞으로 은유가 가질 큰 사랑까지, 마음을 너무 따뜻하게 만드는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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